내 후배 은이가 "언니는 지금까지 삶을 어떻게 지탱해 왔어?"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요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내 세상을 지탱한 것은 책, 남자, 그리고 농담이었으니 그중에 제일이 농담이라. 내 목숨이 다하고 세상이 끝나도 영원히 농담만은 끝나지 않을 거야." 그건 정말이다. 농담의 생존력은 운명보다 거세다.

다시 한 번, 정말이다. 농담이 아니었으면 나는 수백 번은 죽었을 게다. 삽질과 사소한 고난들에 점령당한 채 나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을 보내왔다. 삽질과 그에 따른 고난은 내 삶을 명명백백한 자신의 영토로 삼고 그 위로 너덜너덜한 기치를 높이 휘날렸다. 팍, 팍, 팍, 팍 소리가 나도록 내 마음은 그 깃대에 종종 깊이 뚫렸는데 그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굳은 내 마음에 물기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스무 살이 그렇듯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고 사실은 내가 그 생각에 그다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누가 그 사실에 의심하는 낌새를 보이면 고양이처럼 털을 곧추세우고 싸가지 없이 굴었다. 그때 내가 싸가지 없게 굴었던 사람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해버렸는데. 그렇게 내 삶의 8할은 삽질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삽질은 터프한 청춘의 보증이니까. 살면서 하는 삽질은 인생의 비옥한 토양이 된다. 수많은 부적절한 연애를 비롯해 나는 여자아이들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수를 다 해봤으나 그 실수들로 인해 하나의 진리를 배웠으니 그것은 내 실수로 인해 남의 실수에도 너그러워진다는 거였다!

내 삽질에 웃어넘길 수 있는 진통제는 유일하게 농담이었다. 웃지않고 우리 모드의 이 고난에 찬 삶을 어떻게 견뎌나간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도리수 있는 한 킬킬거리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깨에 힘 빼고, 목에 힘 빼고, 5년 살고 말 게 아니라 50년 까지도 버틸 각오를 하려면 농담 없이는 못 견딘다.

최우에 이기는 자가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자가 최후에 이긴다. 그러므로 나는 지구 종말까지도 킬킬대며 웃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 때문에 누가 나를 탓해도 그냥 웃겠다. 울 수는 없으니까.

(중략)

세상이 별로 원하지 않는 책을 내놨다면 쪽팔리긴 하겠지만 내 삽질이 단 한 명의 그대에게라도 소소한 위로가 될 수 있었다면, 나는 내 삶에 대해 아무에게도 사과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모든 그리운 사람들과 모든 그리운 것들에게 바친다. 그리고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책을 사준 당신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 폼 나게 사로록 노력 좀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첫 단추로 저, 계속 킬킬대며 웃을게요. 당신도 같이 웃자고요. 세상이 끝나더라도 계속 농담할 수 있는 기력만 남아 있으면, 내게는 충분하니까. 이게 다예요.

2005년 겨울
김현진

농담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릿속에 후닥닥 떠오른건 단연코 브루스 윌리스! 나의 존 맥클레인 형사! 난닝구 차림으로 입가에 미소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외투처럼 걸치고 죽을 고생을 하던 했었던 또는 앞으로도 할 그의 운명.

작가 김현진도 앞으로 그러할 운명인듯 싶다.

농담이되 한없이 가볍지만은 않은 진지함이 버무려진 발랄함과 당돌함이 진득하게 손을 건네는 그녀만의 감성이 이 책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체가 비범하다거나 책장이 한장 한장 넘어갈 때마다 쌓여 어느순간 순식간에 매료시키는 맛깔스러움은 다소 부족한듯 싶으나 분명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 줄곧 날 미소짓게 만들곤 했다.

사실 나보다는 좀더 어린친구에게 읽힐만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거침없는 날것 그대로의 당돌함과 맹랑함이 진짜배기 같다는 점. 포장을 말랑말랑 하게 말고 좀더 거칠게 했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이 살짝 인다. 다음 책이 그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그런 작가의 탄생이다.

:-)


멘토가 되는 책의 유형에 묶일 만한 책이기도 한데, 이런 또래 작가들에게 기꺼이 지갑을 여는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 시덥잖은 20대에 해야 할 50가지 또는 30대에 해야할 어쩌구 저쩌구 등등의 시덥잖은 얄팍한 배려(착한척)의 탈을 쓴 또는 정체 불명의 위기감을 조장하면서 늦기전에 돈을 벌어라를 외치는 상품으로서의 책들은 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이제 끝!.
Posted by apple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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