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한지 꽤 된듯.
조금씩 꾸역꾸역 읽어 나가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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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가서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한 아프리카 친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왜 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고,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물어보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단한 리버럴리스트에 극성스러운 '좌파'라고 믿었던 나 자신도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결국 박정희의 자식. 우익 국가주의 속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증세는 이렇다.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한 개인을 졸지에 특정한 나라의 국가대표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유난히 애국적인 나라의 '국가주의 코드'다. 상대가 대답을 하면 이제 머릿속에 당장 그 나라의 1인당 GDP가 떠오른다. 모든 문화적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돈 내고 돈 먹는 사회의 '시장주의 코드'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좌변에 그 나라의 GDP, 우변에 우리나라의 GDP를 놓는다.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좌변과 우변 사이에 들어올 부등호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보다 GDP가 많으면 괜히 그가 존경스러워진다. 우리보다 적으면 은근히 무시하면서 괜히 그에게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을 늘 위아래로 놓고 보는 '보수주의 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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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근대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주체 형성의 방식을 갖고 있었다. 즉 근대인이 삶을  윤리적으로 조직한다면, 그리스인들은 삶을 미학적으로 조직했다. 그들은 삶을 일종의 예술로 바라보아, 그것을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삶을 아름답게 형성하여 예술로 끌어올리는 삶의 방식을 푸코는 '존재미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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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데카르트보다 더 현실적이다. 경험론자답게 그는 경험을 근거로 든다. 인간의 행동을 관찰해본 결과 이성으로 정념을 통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단다.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했다는 경우란 결국 하나의 정념을 또 다른 정념으로 억누른 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념에는 두 부류가 있어, 하나는 '강렬하나 순간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은근하나 지속적인 것'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을 극복한다'는 말은 결국 후자로 전자를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격렬하지는 않지만 오래 지속되는 정념이 무얼까?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앨버트 허슈먼(Albert Hirschman)은 '이해관계'(interest)라고 답한다. 이해관계란 궁정에서는 정치적 이익을, 시장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가리킨다. 여기서 모든 정념의 즉발적 표출을 단 하나의 정념, 즉 물질적 소유욕으로 억누르는 근대인의 전형이 탄생한다. 중세인이 질주하는 야생마라면, 근대인은 소유욕이라는 엔진에 계산능력이라는 핸들을 단 자동차다. 이렇게 미래의 이익(interest)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그런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 부른다.








Posted by apple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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